• FreeLog
  • |
  • 랜덤 블로그
천사 2008/08/03 13:09:00
트랙백 주소 : http://samariel.freelog.net/trb.php?id=107881

 

 

길고 긴 환생…

되풀이 되는 기나긴 시간들.

이제 마지막이다.

이번이 내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다.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어서 날 베세요.”

 

입을 다문 여인의 모습이 비장함마저 느껴진다.

 

“천신녀, 그대는 왕족을 모셔야 하는 신녀임을 잊었는가? 자네와 정분을 통한 사내를 고하면 목숨은 살려 주겠다.”

 

공주의 질문에 여인은 또박또박 입을 놀렸다.

 

“저는 신을 모시는 신녀이오나 또한 한 여인입니다. 어찌 사모하는 이의 목숨을 빌어 이 세상 살길 바라겠습니까. 목숨을 버릴지언정 이 사

랑은 끊을 수 없습니다.”

 

‘천신녀, 당신의 사랑이 그리도 대단한 거요? 모든 걸 내 던져도 아깝지 않은 거요? 그래서 난…. 보이지도 않는단 말이요?’

 

왕자는 이내 여인에게서 눈을 돌리고 만다.

 

“곧 비가 올 것 같으니 왕자와 공주는 궁으로 돌아가시게.”

 

“그럼 뒷일은 아바마마만 믿겠습니다.”

 

왕자와 공주가 사라지고 왕은 신녀에게 다가가 달콤한 제한을 내놓았다.

 

“차라리 자네와 정분을 통한 남자를 고하고 비구니가 되시게. 남자 하나 때문에 목숨을 버리지 마시오.”

 

“사모하는 이를 볼 수 없는 세상은 죽은 것과 같사옵니다. 차라리 죽여주시오.”

 

왕은 착잡한 마음으로 망나니에게 눈짓을 보낸다.

 

하지만 망나니는 쉽사리 들고 있는 칼을 휘두를 수 없었다.

 

그만큼 그녀의 미모는 뛰어났다.

 

“망나니의 의무를 잊었소? 어서 손에 든 칼을 휘둘러 내 목을 베시오.”

 

신녀의 굳은 목소리에 마침내 망나니는 칼을 높게 쳐들었다.

 

신녀의 사연이 안타깝다는 것을 아는 듯 매 한 마리가 신녀의 머리 위를 돌며 서글프게 울부짖었다.

 

곧이어 사람들의 비명소리와 함께 신녀의 옷은 붉게 물들었다.

 

 

 

칙칙하고 어두운 공간.

 

밝고 화사한 카페 안에서 유일하게 어두운 분위기를 조성하고선 우린서로 마주 보며 앉아있다.

 

그 어느 누구도 부럽지 않을 만큼 잘 어울리는 우리.

 

금방 떨어질듯 눈가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곤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한 채 앉아있는 나와 내 앞에서 뻔뻔

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앞에 앉아있는 나의 눈을 아무렇지도 않게 바라보는 그.

 

우리 사이에 있는 테이블에는 각자의 물 컵과 하얀 봉투가 놓여있다.

 

새파랗게 질려버린 내 입가가 파르르 떨렸고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앞에 있는 물 컵을 집어 들었다.

 

그리곤 속이 타는 듯 간신히 물을 마신 채 다시 물 컵을 제자리에 내려놓으며 핏기 없는 입술을 열었다.

 

“무, 무슨 말이야…?”

 

“지워.”

 

간신히 입을 연 나에게 남자는 쌀쌀맞고 차가웠다. 뻔히 자신의 앞에서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날 보면서도 단 한 번도 동정어린 눈길

조차도 없는 매서운 눈길로 나를 노려보며 내 뱉은 말이었다.

 

남자의 거침없는 한마디에 난 모든 걸 체념해버렸다.

 

“민우씨. 나 사랑한 거 아니었어?”

 

“널 사랑한 적 없어. 내가 사랑한건 네가 가진 돈이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자신에게 따뜻한 눈길을 하던 그였지만 아이를 가졌다는 내 말을 듣곤 그의 얼굴에선 그 어디에도 따듯한 미소를 찾

아볼 수 없었다.

 

한 달 전에 실수로 피임을 하지 않은 채 관계를 가진 것이 화근이었다.

 

하지만 그의 아이를 가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아이를 가졌다는 것을 신기해하고 기뻐했을 나에게 그는 차갑기 그지없는 모습이다.

 

난 내 귀를 의심했다.

 

분명 아이를 가졌다는 말을 하기 전까지는 그렇게 다정했던 그인데 이렇게 불현듯 바뀔 리 없었다.

 

이렇게 나에게 차갑고 거칠게 대할 리 없다. 평소에 내 눈에서 눈물이 날라치면 소스라치게 놀라며 어쩔 줄 몰라 하던 그였지만 오늘은

달랐다. 내 눈가에서 눈물이 맺혀 흘러내리는 데도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채 나를 빤히 주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민우씨….거짓말이지? 나 사랑하잖아….”

 

애원어린 눈빛이었다. 제발 그런 말은 하지마. 제발…. 사랑하지 않았다는 말은…….

 

그렇게 애원했다.

 

난 무참히 무너지고 있었다.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사람의 앞에서.

 

“아직 이해 못해? 난 네 돈이 좋았다고. 잠시 가지고 논거 아직도 모르겠어?”

 

“아, 아니. 아냐…. 민우씨 다정한 사람이었잖아.”

 

“아 말이 안 통하네. 말 못 알아들어? 너 사랑한 적 없으니까. 애 지우라고.”

 

남자가 언성을 높였다. 더 이상 상대도 하기 싫다는 듯 날 벌레만도 못하다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사람이 한순간 이렇게 바뀔 수 있는 것일까. 사랑한다고 속삭여주던 사람인데 항상 자신에게 만은 다정하고 살가웠던 사람인데.

어떻게 이렇게 변할 수 있을까.

 

“민우씨…. 당신과 내 아이야. 어떻게 그렇게 쉽게 낙태 시키라는 말이 나오는 거야…?”

 

“후…. 난 너 사랑한적 없어. 장난으로 사랑한다고 말해본 거고 별 뜻 없이 너랑 잔거야.

 

그렇게 쉽게 몸 주고 마음 주고 하니까 그 꼴 되는 거 아냐. 처신 똑바로 했으면 조금 더 내 장난감으로 갖고 놀 수 있었는데 안 되겠다. 넌

이제 유통기한 지난 장난감이야. 알겠냐? 그러니까 구차하고 끈질기게 매달리지 말고 그냥 깨끗하게 낙태하고 더 이상 만날 일 없었으면

좋겠다.”

 

“…뭐……?”

 

“돈은 앞에 있으니까 돈 들고 지금 바로 병원 가서 애 지워. 간다.”

 

남자는 그렇게 그 자리를 떠났다. 난 넋을 잃은 채 금방까지만 해도 자신의 앞에 있던 남자의 자리를 바라보고 있다.

 

더 이상 눈에선 눈물도 흐르지 않았다. 원망스러움. 가장 사랑했던 사람에 대한 배신감, 경멸감으로 몸서리치고 있었다.

 

퉁퉁 부은 눈으로 멍하게 정신 나간 사람처럼 계속해서 자신의 앞자리를 응시할 뿐.

 

파르르 떨리던 입술도 부들부들 떨던 손도 더 이상 미동이 없었다.

 

한참을 그가 떠난 자릴 멍하게 바라보다 내 앞에 놓인 하얀 봉투를 집어 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 앞으로 하얀색 구급차 한 대가 지나갔다.

 

그 길로 난 근처 산부인과로 향했다.

 

산부인과 안에 있는 의사와 간호사, 산모들까지 날 비웃고 욕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환청일지도 몰랐다.

 

“어떻게 오셨어요?”

 

그렇게 간호사가 말했다.

 

“저기, 그게…”

 

난 차마 말을 다 하지 못하고 아래 입술을 깨물면서 병원 안을 뛰쳐나갔다.

 

하늘에선 첫 눈이 내리고 있었다.

 

길가에 서 있는 내 앞으로 빈 택시 한 대가 멈춰 섰다.

 

택시 문을 열고 자리에 앉아 눈을 감으며 의자에 기댔다.

 

독하게 살자…독하게…영리하게. 그래야해.

 

어느덧 눈물이 속눈썹을 적시며 고여 올랐다.

 

“어디로 가세요?”

 

어디로 가다니? 내가 지금 이 땅 위에 갈 곳이 어디란 말인가.

 

 

 

“사장님, 회장님께서 오늘 점심약속 없으시면 함께 하자고 전하셨습니다.”

 

시온의 말 한마디가 하루 종일 결재 서류에 바빴던 내 피곤함을 몇 배 더 가중시켰다.

 

곧 점심시간이 되고 난 근처 호텔식당으로 향했다. 아버지 옆엔 JQ그룹 사장인 신우가 나에게 가볍게 목례를 했다.

 

“회장님, 부르셨습니까.”

 

“밖에서 쓸데없이 격식 차리기는… 앉아라. 너와 밖에서 이렇게 함께 식사해보기 오랜만이구나.”

 

아버지는 식사를 하시면서 이런저런 견제 이야기를 하시며 분위기를 한껏 잡으셨다.

 

식사를 다 마치고 웨이터들이 차를 내오자 역시나 아버지는 준비하신 말씀을 잊지 않으셨다.

 

“내가 두 사람을 함께 부른 건.”

 

아버지가 말을 돌리지 않고 본격적으로 나와 신우의 결혼 이야기를 꺼내었고 난 살짝 아버지의 말을 막았다.

 

“전 결혼생각 없습니다.”

 

아버지는 신우사장 앞이라 함부로 말도 못하시고 그저 못마땅한 표정만 내 비추셨다.

 

“네 나이 이제 31이다. 언제까지 혼자 지낼 거냐?”

 

“좋아요. 결혼은 하죠. 하지만. 정 사장님하고는 안 해요.”

 

나의 발언에 아버지는 한참을 생각하시더니 한풀 꺾이시어 입을 여셨다.

 

“좋다. 그럼 일단 둘이 만나만 보는 건 어떻겠냐?”

 

“먼저 일어나보겠습니다.”

 

난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났다. 더 있다간 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다.

 

회사로 돌아와 어떤 정신으로 어떻게 일을 했는지도 모르게 퇴근시간이 되었다.

 

난 곧장 차를 대학교 때부터 자주 갔던 바(bar)로 몰았다.

 

바 안으로 들어서자 언제나 그렇듯 여기저기서 날 알아보는 사람들이 관심 있게 날 눈여겨보았다.

 

“오늘도 같은 거?”

 

주인언니의 물음에 난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기분이 안 좋아 보이네? 또 회장님이랑 한바탕 했어?”

 

방금 만들어진 칵테일을 내 앞에 놓으며 언니는 호기심어린 눈빛으로 나에게 물었다.

 

“그렇죠 뭐.”

 

칵테일 잔은 금세 비워졌고 양주 한 병을 제법 취기가 오를 때까지 마시고 또 마셨다.

 

잔에 양주를 따르려는데 누군가의 손이 내 손에 있던 양주병을 채갔다.

 

“그만 마셔요”

 

“최시온, 나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

 

“제가 누나 여기 있는 거 모르면 누가 알겠어요. 일어나요. 데려다줄게요.”

 

“난 괜찮으니까 가봐.”

 

그는 내 말을 들리지도 않는 듯 술값을 지불하고 주차장으로 날 거칠게 차에 태웠다.

 

시온과 내가 탄 차는 부드럽게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아까, 점심시간에 무슨 일 있었어요?”

 

“일은 무슨 일. 아무 일도 없었어.”

 

“귀신을 속여요. 내가 누나 안지가 몇 년째인데. 그냥 정사장이랑 결혼해요. 누나한테 딱 잘 어울리는 사람이잖아요.”

 

“너라도… 너라도 내 편이 되어주면 안되니?”

 

나의 말에 그는 한참동안 말없이 운전만 했다.

 

“그럼 나한테 올래요?”

 

말이 없던 그가 집 앞에 도착하자 많이 고민한 듯 내뱉은 말이었다.

 

“나한테… 마음 주지 마. 너만 다치게 될 거야.”

 

“내가… 민우 형 동생이라 그래요? 그래서 나한테 올수 없다는 거예요?”

 

“아니야, 그런 거….”

 

어느새 내 속눈썹이 젖어있었다. 그리고는 곧 물방울이 또르르 내 볼을 타고 흘렀다.

 

“미안해요.”

 

나의 눈물에 시온은 미안한 듯 당황해 했지만 시온의 말에도 물방울은 또다시 내 볼을 타고 흘렀다.

 

그는 내 얼굴을 자신의 양손 가득 감쌌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어둠속에서도 밝게 빛을 내고 있었다.

 

그가 내 입술에 조용히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촉촉한 입술의 떨림이 그대로 전해졌다.

 

입술을 뗀 그는 엷게 미소를 지었다.

 

“힘들면 나한테 와요.”

 

나. 이사람 좋아하는 것 같다.

 

떨리는 마음을 간신히 진정시키고 집안으로 들어가자 내 딸, 아니, 내 동생이 반갑게 날 맞이했다.

 

“언니, 오늘 많이 늦었네. 윽, 냄새. 또 술 먹었어?”

 

“응, 조금. 다녀왔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여기 좀 앉아라.”

 

“오늘 점심때 하신 이야기라면 제 생각은 변함없습니다.”

 

2층에 올라가다가 어머니의 음성이 내 귀로 닿았다.

 

“그냥 제 말대로 하자니까요? 언론에 약혼 발표하면 사희도 어쩔 수 없을 거잖아요.”

 

이틀 뒤 나와 JQ그룹아들과의 약혼소식이 온신문과 언론사에 헤드라인으로 올려 있었다.

 

회사 안에서도 나와 한사장의 약혼은 남의 말 하기 좋아하는 여직원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하루하루 약혼날짜가 다가올수록 나의 마음은 복잡해져갔다.

 

그리고 그날. 수많은 인파속에 한사장과 나와의 사랑 없는 약혼이 시작되었다.

 

한사장이 내 손을 잡고 하객들에게 인사를 했다.

 

“네, 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네요. 여기서 류사희양과 한신우군의 사랑의 키스를 보지 않을 수 없겠죠?”

 

어른들은 눈살을 찌푸리며 사회자에게 제재를 가했지만 눈치 없는 젊은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난 하객들을 둘러보았다.

 

그가 있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는 사람들 틈으로 몸을 숨겼다.

 

한사장에 나에게로 몸을 돌렸다.

 

그가 내 허리에 팔을 감았다. 그러고는.

 

내 입술에 그의 입술을 포개며 한참을 그렇게 애무했다.

 

젊은이들의 환호성. 난 입술을 떼려 했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확인이라도 받는 듯 그가 더 강하게 다가왔다.

 

여기저기서 민망해하는 어른들의 헛기침소리가 들리자 사회자도 자신이 분위기를 띄우려 만들어놓은 상황이 당황스러웠는지 황급히 수습하

기에 이르렀다.

 

“예비신랑 한신우군, 못 다한 키스는 둘만의 조용한 공간에서 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최악의 약혼식은 끝이 났다.

 

이제 모든 게 끝났다.

 

식이 끝나고 난 그를 찾았지만 그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만날 수 없었다.

 

“저 잠시 머리 식히려 여행 좀 다녀올게요.”

 

“곧 결혼식인데 어딜 간다는 게냐. 결혼식 때까지 집에 얌전히 있어라.”

 

“결혼식 전까진 돌아올게요.”

 

여권과 비자는 바로 나갈 수 있게 준비가 다 되어 있었기 때문에 급하게 비행기 표를 구하고 간단하게 짐을 꾸리고 나섰다.

 

집 앞에 낯익은 차가 서있었다.

 

시온이 천천히 차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

 

“어디가요?”

 

“답답해서 여행 좀 다녀오려고.”

 

그는 한없이 화가 난 듯 어떻게 보면 상처를 입은 듯한 얼굴로 내게 다그쳤다.

 

“누나 뭐예요?”

 

“뭐가?”

 

“도대체 누나 마음이 뭐예요? 그때 눈물 보인거 우리 형 때문 아니었어요?”

 

“네 형 때문이 아니라. 너… 때문이야.”

 

그는 말을 더 하지 못하고 날 자신의 품에 안았다.

 

밀쳐내야 하는데 팔이 말을 듣지 않는다.

 

돌아가라 말을 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는 두 손으로 내 볼을 감싸주고 내 얼굴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그리고 날 차에 태우고 공항으로 향했다.

 

“제주도행 티켓 두 장 주세요.”

 

“최시온.”

 

“아무 말도 하지 말아요.”

 

우리는 마지막 비행기로 제주도에 도착했다. 해는 이미 졌지만 그와 함께 밤바다를 구경 할 수 있었다. 그가 몸을 돌려 날 바라보았다. 그

리고 따뜻하게 겹쳐오는 그의 입술. 그의 체취가 바닷바람에 섞여 들어왔다.

 

호텔에 도착하고 예상외로그는 방을 두 개 잡았다.

 

“쉬어요. 많이 피곤할 텐데. 아침 일찍 깨울게요. 내일 해 뜨는 거 같이 봐요.”

 

“싫은데?”

 

난 장난스럽게 웃으며 그의 넥타이를 잡아당겼다.

 

그의 등 뒤로 문이 닫혔다.

 

“방에서 혼자 뭐하려고? 나랑 같이 있어.”

 

“왜이래요? 무슨 짓이에요?”

 

“니 머릿속에 있는 짓.”

 

그의 재킷을 부드럽게 벗겨 내리며 나는 장난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그의 느슨해진 넥타이를 양손으로 잡아끌며 입술을 덮치는 나의 손을 살짝 밀어냈다.

 

“누나,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거예요?”

 

“오늘 하루만. 네 여자 할게”

 

“그게 말이 되는 소리예요?”

 

“오늘 하루만. 오늘 하루만 나 최시온의 여자로 대해줘.”

 

“누나를 하룻밤 여자로 안지 않으려고 참고 또 참았어요. 하룻밤이 아닌 평생 내 여자로 있어줘요. 약속. 해요.”

 

내가 그의 입술에 키스를 하며 셔츠를 벗기자 그는 내게 다그치듯 말했다.

 

“약속해요. 내 여자가 되어주겠다고.”

 

“응. 그럴게.”

 

내 대답이 떨어지자 그는 신음을 토하며 나의 목에 키스를 퍼부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가 되기 위해 성급한 손길을 서로에게 향했다.

 

그의 규칙적인 숨소리를 들으며 나는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조용히 침대를 빠져나오는데 그가 내 팔목을 잽싸게 잡았다.

 

“어디가요?”

 

“일어났어? 더 자.”

 

“어디 가냐고요.”

 

“화장실. 나 때문에 깼구나?”

 

“실은 한숨도 못 잤어요. 누가 도망가 버릴까봐. 꿈이라면 깨기 싫어서요. 너무 떨려서 심장이 터질 것 같았어요. 지금 이렇게 누나랑 함께

있는 것도 너무 행복해요.”

 

“조금만 눈 붙여.”

 

은비 재우던 신력으로 간신히 그를 재우고 조심스럽게 호텔을 빠져나왔다.

 

“어제 LA행 비행기 놓친 차서린입니다. 다음 비행기는 언제쯤 예약 할 수 있을까요?”

 

혹시나 그와 마주칠까 부산으로 와서 비행기를 탔다.

 

그곳엔 유학시절 같이 지낸 로라가 있다.

 

세달 후.

 

“너 말 안할래?”

 

“뭘?”

 

“내가 너랑 같이 신게 몇 년인데 내가 아직도 눈치 못 챘을 거 같아?”

 

“뭐가?”

 

“세 달이 다되도록 화장실에서 네 쓰레기 못 봤어.”

 

“그게 무슨 소리야?”

 

“너 임신했지? 그래서 여기로 온 거지? 집에다 연락도 안하고. 혼자 애 키우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아?”

 

옆에서 잔소리하는 로라의 말을 귀 뒤로 흘리면서 아직 티도 나지 않는 배를 괜스레 쓸어보았다.

 

똑똑똑.

 

“네, 나가요. 누구세요?”

 

그였다. 최시온.

 

“더 꽁꽁 숨어있지 그랬어요. 영원히 못 찾을 만큼 먼 곳으로. 그래서 누나 찾다가 나까지 죽으면 평생 미안해하며 죄책감가지고 살지 그

랬어요.”

 

“차 내올게. 앉아있어.”

 

주방으로 향하는 내 팔목을 그가 낚아채듯 잡았다.

 

“내가 손님이에요? 약속했잖아요. 내 여자 되기로. 그런데 어딜 숨어있는 거예요? 저랑 같이 돌아가요.”

 

“돌아가면 난 돌이킬 수 없는 곳으로 가게 되잖아.”

 

“우리 자리로 돌아가야죠.”

 

이렇게 말하는 그를 더 이상 뿌리칠 수 없었다.

 

오랜 비행 끝에 한국에 도착했지만 전화 비행에 지치지 않았다.

 

돌아온 회사에는 나에 대한 온갖 더러운 루머가 나돌고 있었다.

 

“어머, 둘이 아주 도망간 건 아닌가 보네?”

 

“게다가 지금 사장님 동생이 원래는 사장님 딸이라며. 아빠는 최시원이고.”

 

“사장님 그렇게 안 봤는데 완전 걸레네?”

 

“그럼 이제 JQ그룹 아들이랑은 끝난 거네?”

 

“당연하지, 우리가 알고 있는데 그 집안인들 조용하려고?”

 

“사장님, 회사에 수군대는 소리 들으셨어요?”

 

허둥지둥 들어오며 하는 그의 말에 난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왜 웃어요?”

 

“일거리 하나 줄었잖아. 내 파혼.”

 

기다렸다는 듯이 아버지가 날 불렀다.

 

“행실을 어떻게 하고 다녔기에 그런 헛소문이 나?”

 

“근거 없는 소문이 어디 있겠어요? 헛소문 아니에요. 시온이와 저. 서로 좋아해요. 허락해주세요.”

 

놀라 펄쩍 뛰는 아버지의 앞에서 난 여유롭게 미소를 지었다.

 

“택하세요. 새로운 경영인을 영입하시든지. 물론 이 경우는 그가 회사사정을 파악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는데다가 당장 이번 프로젝트에

대한 급한 시안을 처리하는데 문제가 많겠지요. 그리고 마지막은 저와 시온이를 택하시던 지요.”

 

“어떻게 나한테..”

 

“시간은 많이 드리지 않겠습니다. 지금 사장실로 가서 시온이와 짐을 싸겠어요. 짐을 다 싸고 나서 연락하셔도 그대로 잠들고 나갈 겁니다.

마지막 사안을 택하신다면 그 전에 연락 주여야겠지요.”

 

잔뜩 인상을 쓰고 있는 아버지에게 말을 내뱉은 후 사장실로 향했다.

 

엘리베이터가 1층에 있어 시간이 걸렸다.

 

물이 열리고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막 문이 닫히는 순간 다시 문이 열리며 아버지의 여비서가 숨을 헐떡이며 엘리베이터를 세웠다.

 

“회장님께서 다시 찾으십니다.”

 

 

 

결혼식을 일주일 남긴 어느 날. 퇴근시간이 되고 시온은 무작정 날 차에 태우더니 어디론가 향했다.

 

뒷좌석에 하얀 국화꽃다발이 놓여 있었다.

 

“뒤에 꽃 뭐야?”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한테 줄 거예요.”

 

“누군데?”

 

“누나를 무지 보고 싶어 하는 사람.”

 

그가 날 데리고 온 곳은 많은 고인들이 잠들어있는 납골당이였다.

 

어리둥절해하는 나를 조심스레 어디론가 안내했다.

 

그리고 내 눈에 보이는 낯익은 사진 한 장.

 

 

 

그 남자 story.

 

난 어려서부터 몸이 약했다.

 

조금만 달려도 죽을 것 같이 숨을 헐떡였고 일주일에 한두 번씩은 쓰러지기 일쑤였다.

 

난 심장병을 앓고 있었다.

 

제대를 하고 학교에 복학을 한 얼마 뒤 긴 생머리에 예쁘장하게 생긴 신입생을 소개 받았다.

 

얼굴도 예쁘고 성격도 좋은데다가 HE그룹 회장 딸이라기에 처음엔 아무 느낌 없이 그렇게 몇 번 만나게 되었다.

 

하지만 곧 그녀의 순수한 모습에 해서는 안 될 결심을 하게 되었다.

 

언제 쓰러지고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내가 천사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1년 동안은 정말 행복했다.

 

한여름에도 차가운 나의 손을 매만지며 그녀는 항상 걱정하며 날 바라보았다.

 

1년 동안은 내가 아픈지도 모르게 행복하게 지냈다.

 

그녀가 정말 나에게 내려준 천사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하늘이 나에게 그런 행복을 질투라도 하는 듯 불행이 찾아왔다.

 

그녀가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말을 건넸다.

 

“오빠, 나 임신했어.”

 

그녀의 말 한마디에 난 너무 혼란스러웠다.

 

그녀와 나의 아이라니. 너무 행복하고 기뻤다.

 

하지만 그녀처럼 마냥 기뻐할 수는 없었다.

 

아파서 어제 쓰러질지도 모르는,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내가 죽기라도 한다면...

 

일단 내일 이야기 하자고 한 뒤 나는 급하게 돈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다음날에도 사희는 행복해 보였다.

 

저렇게도 행복해 하는 그녀에게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까.

 

나를 보고 미소를 지으며 그녀가 내 앞에 앉았다.

 

하지만 그녀의 미소에 난 그녀를 향해 미소 지을 수 없었다.

 

“지워.”

 

간신히 입을 연 열었다.

 

그녀가 내 앞에서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저 어리고 여린 그녀의 마음이 얼마나 아플까?

 

“민우씨. 나 사랑한 거 아니었어?”

 

“널 사랑한 적 없어. 내가 사랑한건 네가 가진 돈이야.”

 

“민우씨….거짓말이지? 나 사랑하잖아….”

 

애원어린 눈빛이었다. 제발 그런 말은 하지 마. 제발…. 사랑하지 않았다는 말은…….

 

그녀의 눈은 그렇게 애원했다.

 

하지만 그녀는 무참히 무너지고 있었다.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사람의 앞에서.

 

“아직 이해 못해? 난 네 돈이 좋았다고. 잠시 가지고 논거 아직도 모르겠어?”

 

“아, 아니. 아냐…. 민우씨 다정한 사람이었잖아.”

 

“아 말이 안 통하네. 말 못 알아들어? 너 사랑한 적 없으니까. 애 지우라고.”

 

“민우씨…. 당신과 내 아이야. 어떻게 그렇게 쉽게 낙태 시키라는 말이 나오는 거야…?”

 

“후…. 난 너 사랑한적 없어. 장난으로 사랑한다고 말해본 거고 별 뜻 없이 너랑 잔거야.

 

그렇게 쉽게 몸 주고 마음 주고 하니까 그 꼴 되는 거 아냐. 처신 똑바로 했으면 조금 더 내 장난감으로 갖고 놀 수 있었는데 안 되겠다. 넌

이제 유통기한 지난 장난감이야. 알겠냐? 그러니까 구차하고 끈질기게 매달리지 말고 그냥 깨끗하게 낙태하고 더 이상 만날 일 없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