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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쿠아마린 2008/08/03 13: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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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권이랑 비자 발급되는 대로 은주랑 찾아뵐게요.”

 

수화기를 내려놓은 나는 미친 듯이 웃어댔다.

 

수선스럽게 거실 안을 왔다 갔다 하기도 하고 침대 위로 몸을 날리기도 했다.

 

그런다가 책상위에 놓여있는 액자와 눈이 마주쳤다.

 

은주의 사진이 들어 있었다.

 

액자를 집어 가만히 들여다보던 나는 마치 사람을 대하는 듯 액자를 가슴에 안아보기도 하고 입을 맞추기도 했다.

 

그리고는 진지한 표정으로 액자를 바라보았다.

 

“우리 만난 지 벌써 4년째야,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 우리 결혼하자.”

 

닭살 돋는 시늉을 하며 고개를 절래 흔들었다.


“오은주, 내일 너의 부모님 찾아뵙고 정식으로 인사드리자. 그리고 함께 미국 가서 우리 부모님께도 인사드리자.”


이렇게 혼자 연습을 하고 있는데, 때마침 주머니 속 핸드폰이 진동했다.

 

그 바람에 액자를 놓치게 되었고 유리가 박살나버렸다.

 

[나 지금 집에 왔어, 씻고 메신저 접속할게.]

 

메시지를 확인한 나는 사진위에 널려 있는 유리조각들을 주워 쓰레기통에 담았다.

 

액자를 쓰레기통위에 대고 털어냈다.

 

남아있는 유리 조각들을 피해 냉장고 옆에 진공청소기를 가져다 유리파편을 모두 빨아드렸다.

 

그래도 안심이 안 되어 젖은 걸레로 바닥을 닦았다.

“아얏!”

조심한다고 조심 했건만 남아있던 유리조각이 내 살을 파고들었다.

 

액자를 다시 제자리에 두고 액자에 입을 맞추려다 사진 속 은주의 눈과 마주쳤다.

 

화장기 없고 웃음기도 없는 깨끗한 얼굴. 어쩐지 사진 속 그녀가 슬퍼 보인다.

 

액자 옆에 걸려있는 달력을 보았다.

 

 올해는 2월이 29일까지 있는 4년마다 돌아온다는 윤달이다.

 

난 4년 전 2월 29일 은주를 만났다. 사진 속 은주는 바로 그날의 은주였다.

 

날 만나기 바로 직전의 은주.

 

 

4년 전 난 학과 사무실에서 조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졸업하고 가면 좋을 텐데.”

 

조교는 내가 내민 자퇴신청서를 들여다보았다.

 

“저도 졸업하고 가고 싶었는데 가족 모두 이민을 가게 되어서 어쩔 수 없네요.”

 

“그래, 자퇴처리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교수님 오시면 뵙고 가. 금방 오실거야.”

 

조교가 손을 내밀었다. 난 악수를 하고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휴게실 의자에 앉아 텅 빈 캠퍼스를 바라보았다.

 

맞은편 자판기의 광고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마시고 싶어요.’

 

난 광고 문구를 향해 입을 삐죽 내밀었다.

 

주머니를 뒤적거리는데 동전이 하나도 없었다.

 

커피는 100원이었다.

 

주먹으로 괜스레 자판기를 툭 쳐보았다.

 

그때 엘리베이터에서 ‘띵’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1학년으로 보이는  여자가 나왔다.

 

그녀는 까맣고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날 한번 힐끗 쳐다보더니 학과 사무실로 새침하게 들어갔다.

 

나의 눈이 카메라의 움직임처럼 그녀를 쫓았다.

 

문이 닫혔지만 그녀의 모습이 눈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10분정도 지났을 때 학과사무실이 열리고 그녀가 나왔다.

 

그녀는 문을 닫고 내가 있는 곳으로 몸을 돌렸다.

 

자판기 앞에 선 그녀는 동전을 꺼내려다가 100원짜리 동전 하나를 떨어뜨렸다.

 

동전은 나를 향해 굴렀고 내 신발에 부딪치더니 나자빠졌다.

 

동시에 동전을 향해 나와 그녀의 시선이 쏠렸다.

 

난 허리를 굽혀 동전을 집어 들어 자판기 앞으로 걸어가 투입구에 동전을 넣어 블랙커피를 뽑았다.

 

아무런 말없이 커피를 뽑아들어 원래 앉아 있던 자리로 가서 앉았다.

 

그녀의 눈길은 아랑곳 않고 쓴 커피를 한 모금 입에 물었다.

 

나의 행동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그녀는 동전 한 개를 다시 꺼내 자판기 투입구에 넣었다.

 

커피를 삼킨 난 쓴 표정을 지었고 그 모습을 보았는지 그녀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내 밀크커피를 뽑더니 내 앞으로 다가왔다.

 

“블랙을 마실까? 밀크를 마실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잘 됐네요. 우리 섞어 마셔요.”

 

그녀는 내 손에서 종이컵을 빼앗아 블랙과 밀크를 적당히 섞었다.

 

한잔을 다시 나에게 내밀었고 종이컵을 받으려다 그녀의 손이 닿아 하마터면 컵을 놓칠 뻔 했다.

 

그녀는 아무런 말없이 나의 옆에 한 칸을 비우고 앉아 서로 한마디도 하지 않은체 커피를 마셨다.

 

난 커피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삼키고 종이컵을 구겼다.

 

침묵을 깨뜨리며 그녀가 나에게 먼저 말을 건네 왔다.

 

“신입생인가요? 난 한 번도 본적이 없는 것 같은데.”

 

“복학생인데요.”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 손에 들린 구겨진 종이컵을 빼앗아 자신의 빈 종이컵과 겹쳐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리고 싱긋 웃어 보였다.

 

“다음부터는 동전 필요하면 그냥 달라고 하세요. 개강하면 봐요.”

 

그녀는 계단으로 내려갔다. 난 고개를 들어 그녀의 뒷모습을 훔쳐보았다.

 

그녀의 모습이 건물에 가려 보이지 않자 난 학과 사무실로 들어갔다.

 

“조교님, 자퇴서 좀 돌려주세요.”

 

조교는 날 멀뚱히 쳐다보더니 서랍에서 서류를 꺼내 나에게 돌려주었다.

 

난 그 앞에서 서류들을 찢어버렸다. 그리고 조교에게 물어보았다.

 

“복학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난 그날 일을 행각하다가 고개를 흩어버리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컴퓨터를 부팅시켜 메신저에 접속을 했는데 은주는 아직 로그인이 되어있지 않았다.

 

난 냉장고로 가서 캔 맥주와 오징어를 꺼내들었다.

 

가스레인지에 올려 오징어를 구웠다.

 

오징어의 몸이 춤이 추는듯했다. 탄내가 나자 불을 끄고 오징어를 집어 들었다.

 

뜨거움을 참지 못하고 오징어를 공중으로 던졌다 받았다 하고 제일 긴 다리 하나를 입으로 찢어 질겅거렸다.

 

컴퓨터로 돌아와 앉았다. 메일을 정리하려고 보관함을 클릭했다.

 

30통이나 와 있었다. 모두 광고메일이었다. 클릭, 삭제, 클릭, 삭제를 반복하다가 캔 맥주를 따고 한 모금 들이켰다.

 

맨 위에 남은 메일 하나가 눈에 띄었다.

 

보낸 이는 [노스트라다무스] 10분전에 도착한 것이었다.

 

제목은 ‘당신의 시간을 바꾸어드립니다.’

 

난 피식 웃으며 메일을 열어 보았다.

 

난 이 한 번의 클릭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지 생각지도 못했다.

 

-이 메일을 여는 순간 당신은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시간의 개념이 부서지면서 당신의 원하는 날의 순서가 뒤바뀌게 될 것입니다.

날짜를 선택하시고 ‘수락’을 클릭하십시오.

 

난 비웃었다. ‘별 미친 놈 다 있네.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가만 생각해보니 내일 은주에게 프러포즈한 다음의 결과가 궁금해졌다.

 

난 바꾸고자 하는 날짜 안에 28일과 29일을 기입하고 ‘수락’이라는 글자를 클릭했다.

 

그러자 화면이 바뀌었다.

 

 

-이제 당신은 29일을 먼저 겪은 후 28일을 겪게 될 것입니다. 명심하세요. 내일 눈을 뜨면 당신은 28일이 아닌 29일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리고 시간의 순서가 바뀌기 전까지 절대 이 메일을 삭제하시면 안 됩니다.

 

난 어이가 없어서 메일의 삭제부분을 누르려 마우스를 옮겼다.

 

 때마침 은주의 메신저가 로그인이 되었다

 

[은주]-자기 뭐해?

[민우]-자기 기다리고 있었지.

[은주]-밥은 먹었어?

[민우]-응 먹었어.

[은주]-뭐먹었어?

[민우]-맥주마시고 있었지.

[은주]-혼날래? 밥 꼬박 챙겨 먹으랬지?

[민우]-알았어. 꼭 먹을게.

[은주]-내일 뭐할 거야? 나 4일 동안 쉬는데.

[민우]-너 만나야지. 12시 어때? 어디서 볼까?

[은주]-항상 가는 커피숍. OK?

[민우]-거기 분위기 너무 축 처지는데, 돈 보태서 분위기 좀 바꾸자.

[은주]-그래도 난 거기가 제일 좋던데, 자기랑 첫 데이트한 날 간곳이기도 하고.

[민우]-알았어. 그럼 거기서 보자. 늦은 사람이 쏘는 거다.

[은주]-난 자신 있으니 자기나 늦지 마. 참, 이거 들어봐.

 

은주가 보낸 파일을 열자   가 흘러 나왔다. 난 볼륨을 높였다.

 

난 몸을 뒤척이다 무언가 물컹한 것이 만져지자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은주가 눈을 다 뜨지도 못하고 일어나 눈을 비비며 중얼거렸다.

 

“지금 몇 시야?”

 

“6시 반, 근데 언제 왔어?”

 

은주는 고개를 이러 저리 흔들더니 기지개를 켜고 하품을 했다.

 

은주가 안고 있던 이불이 내려가면서 그녀의 젖가슴이 드러났다.

 

내가 입을 벌리고 쳐다보자 수진은 내 맨 팔뚝을 짝 소리가 나게 후려쳤다.

 

“얼릉 씻고 준비해. 난 아침 준비할게.”

 

난 이불을 두른 채 화장실로 향하는 그녀를 멀뚱히 쳐다보았다.

 

난 침대에서 일어나려다가 발이 욱신거림을 느꼈다.

 

발에 붕대가 감아져 있었다.

 

 난 리모컨을 집어 들어 TV를 켰다. 뉴스가 나오고 있는 화면 우측 상단에 29일이라는 자막이 눈에 들어왔다.

 

눈을 비비고 다시 쳐다보았지만 날짜는 분명 29일이었다.

 

“은주야, 오늘 며칠이야?”

 

어느새 내 반바지와 셔츠를 헐렁하게 걸치고 머리를 묶은 은주가 주방에 서 있다가 고개를 돌려 대답했다.

 

“29일.”

 

내 머릿속에 어제 본 메일이 떠올랐다.

 

“나 발 아파. 왜 그런 거지?”

 

은주는 손에 묻은 물기를 앞치마에 닦으며 나에게 다가왔다.

 

내 이마를 짚는 은주의 손에는 내가 준비한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열은 없는데, 출혈이 심했나? 왜 기억을 못해, 어제 자기가 유리 밟아서 그랬다며. 바보같이.. 얼른 씻어. 보기 민망해.”

 

은주는 다시 주방으로 갔다. 난 알몸인 채 왼쪽발로 깡충 뛰어 은주의 뒤를 쫓아가 은주를 감싸 안았다.

 

“얼른 옷부터 입어, 발가벗고 돌아다니지 말고.”

 

난 그녀의 손을 감쌌다. 반지가 만져졌다.

 

“고마워.”

 

난 샤워를 끝내고 말끔하게 옷을 입고 나와 식탁에 앉았다.

은주가 보글보글 끊는 찌개를 식탁에 조심스럽게 놓았다.

 

은주가 나에게 밥을 건네주고 마주 앉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서둘러”

 

내가 입에 밥을 한 가득 물고 물었다.

 

“오늘 나 엄마한테 내려가는 날이잖아. 버스시간 늦는다고 오빠가 터미널까지 은지랑 데려다 준다면서.”

 

난 더 이상 묻지 않고 밥을 먹는데 열중했다.

 

“얼른 먹고 집에 가자. 은지, 나 외박한 거 알면 엄마한테 이를지도 몰라.”

 

“은지 지금 집에 없어?”

 

난 무의식적으로 물어보았고 은주는 눈을 흘기며 말했다.

 

“어제 말했잖아. 은지 스터디에서 MT갔다고. 그래서 나를 끌고 와서는 짐승처럼.”

 

난 고개를 끄덕였다.

 

난 지금 나에게 일어난 일과 메일에 대한 것을 은주에게 이야기를 해야 하나 고민했지만 어차피 믿지 않을 것 같아서 그만 두기로 했다.

 

“꿈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나 너무 행복해.”

 

은주는 피식 눈웃음을 치더니 몸을 일으켜 밥이 잔뜩 들어 도톰한 나의 볼에 뽀뽀를 했다.

 

“나도 행복해.”

 

난 고개를 숙이고 밥 먹는데 열중했다.

 

“은지 오전에 일찍 온다고 했으니까 먼저 집에 가서 기다리다가 오면 데리고 가자.

 

문 밖을 나서는데 은주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자기야, 우리 차 두고 가자.”

 

은주가 턱으로 내 오른발을 가리켰다. 난 오른쪽 발이 욱신거림을 느꼈지만 제자리에서 뜀박질하는 포즈를 취했다.

 

“괜찮아. 그리고 은지랑 너랑 터미널까지 데려가려면 서둘러야 하잖아.”

 

난 주차장으로 먼저 내려가 빨간색 승용차에 키를 꽂았다.

 

터미널까지 데려다주고 그날 밤.

 

냉장고에서 캔 맥주를 꺼내 소파에 앉아 무의식적으로 TV를 틀었다. 때마침 뉴스가 하고 있었고 교통사고 소식이 들려왔다.

 

“부산 행 고속버스, 사고로 25명 부상, 1명 사망.”

 

화면 하단에는 ‘오은주 사망’ 이라는 자막이 표시되었다.

 

난 침대 안에서 짐승의 울음소리처럼 큰 오열이 터져 나왔다.

 

그렇게 울면서 난 지쳐 잠이 들었다.

 

 

-내 시야에 중앙선을 침범한 15t 화물트레일러가 확대되었다. 조수석에 앉아있던 은주가 비명을 질렀다. 난 브레이크를 밟으려 했지만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내 불긍ㄴ색 자동차가 트레일러의 정중앙에 부딪치며 종이처럼 구겨졌다.

난 은주를 쳐다보았다. 은주의 몸이 물 풍선 터지듯이 피를 튀기며 터져 버렸다. 내 눈에 보이던 것들도 사라져버렸다. 나의 몸 역시 갈기갈기 찢어져 버렸다.

 

난 얕은 신음소리를 내며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침대가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악몽 때문인지 난 쉽사리 진정하지 못하고 거친 숨을 몰아쉬며 주위를 둘러보고 눈을 비볐다.

 

시계는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리모컨을 찾아 TV전원을 켰다.

 

뉴스가 나오고 있는데 화면 상단에 28일이라는 날짜 자막이 눈에 들어왔다.

 

긴 한숨을 뱉어내고 주방으로 향했다. 갑자기 오른쪽 발에 심한 통증을 느꼈다.

 

바닥에 주저앉아 발바닥을 들어다보니 엄지발가락 밑에 손톱만한 유리조각이 박혀있었다.

 

그걸 뽑아내자 피가 새어 나왔다. 싱크대에 걸려있는 키친타올을 향해 손을 뻗어 타올로 상처 부위를 싸매었다.

 

통증보다도 불길함 때문에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때 뻐꾸기 알람 소리가 집안의 적막감을 깨며 울려댔다.

 

난 무릎으로 기어가 시계의 버튼을 눌렀다.

 

뻐꾸기는 울음을 멈추었다. 방안은 다시 적막감에 휩싸였다.

 

이번엔 전화벨이 울렸다.

 

바로 앞에 전화기가 있었지만 쉽게 핸드폰을 집어 들지 못했다.

 

핸드폰을 집어든 내 손이 가늘게 떨렸다.

 

숨을 한번 크게 쉬고는 핸드폰의 통화 버튼을 눌렀다.

 

“자기야, 일어났어?”

 

은주의 밝고 경쾌한 목소리가 내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난 목맨 소리고 대답했다.

 

“어, 지금 막.”

 

“어제 내 꿈 꿨어?”

 

“아니.”

 

“치, 말이라도 ‘그래’ 라고 해주면 안 돼? 못 댔어. 정말.”

 

은주의 애교 섞인 핀잔에 담담하게 받아쳤다.

 

“닳을까봐 그래. 은주 꿈 닳을까봐. 그래서 아끼는 거야.”

 

“그런 게 어디 있냐? 닳아도 되니까 걱정 말아. 오늘 약속 시간에 늦지 말고 나와. 아침 꼭 챙겨먹고. 알았지?”

 

“어.”

 

내 무뚝뚝한 대답 끝에 은주의 마지막 한마디가 내 귓불을 간질였다.

 

“사랑해!”

 

통화가 끊어졌다. 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데도 핸드폰을 내려놓지 못했다.

 

“나도.”

 

난 오른쪽 발을 쳐다보았다.

 

피가 번져 얼룩덜룩한 키친 타올을 풀자 피는 멈췄지만 상처가 깊게 나있었다.

 

찬장을 열어 구급약통을 꺼내었다. 4년 전 은주가 사준 것이었다.

 

 찬장 깊숙이 손을 뻗어 조그만 반지함을 꺼냈다. 청색의 반지함을 열자 ‘아쿠아마린’이 박힌 반지가 맑은 빛을 던졌다.

 

‘아쿠아 마린, 침착하고 총명하고 용감하고.. 은주 너랑 닮았다.’

 

난 혼잣말을 하다가 뚜껑을 닫아버렸다.

 

난 대충 옷을 입고 집 밖으로 나갔다. 주차장에 주차해둔 차를 힐끗 보고는 큰 도로로 걸음을 재촉했다.

 

마침 빈 택시가 달려왔고 손을 흔들어 택시를 세웠다.

 

“월미도로 가주세요.”

 

난 창밖을 바라보면서 월미도에서 만났던 노인을 떠올렸다.

 

 

1년 전쯤 은주와 원미도 광장을 걷고 있을 때였다. 70세가량 되어 보이는 한 노인이 은주를 향해 대뜸 이런 말을 했다.

 

“아가씨 생년월일이 어떻게 되는가?”

 

얼굴이 불그스름한 것이 적지 않게 취한 듯 했지만 눈빛만은 멀쩡한 사람보다 더 차갑고 날카로워보였다.

 

난 노인의 말이 의미심장하게 들려 좌판에 앉으려했다.

 

은주는 당황한 얼굴로 나의 팔을 잡아끌었다.

 

“자기야, 그냥 가자.”

 

“재미삼아 한번 보자.”

 

나의 말에 은주는 안절부절 못했다.

 

내가 나와 은주의 생년월일을 노인에게 말하는데 은주가 날 두고 홱 돌아서 혼자 걸어갔다.

 

난 은주의 갑작스런 행동에 자리에서 일어나 뒤를 쫓아가려 하였다.

 

그때 노인이 날 향해 입을 열었다.

 

“그 아가씨 단명이야. 살만큼 살았어.”

 

난 노인을 한번 쳐다보고 어이없어하며 저만치 걸어가는 은주를 향해 뛰어갔다.

 

“다 왔습니다.”

 

택시기사아저씨의 목소리에 난 깊은 생각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월미도에 도착한 나는 노인을 찾아보았지만 쉽지 않았다.

 

노숙자들이 문이 닫힌 가게 앞에 웅크리고 있었다. 난 그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다가 커피 자판기 앞에 웅크리고 있는 노인을 발견하였다.

 

노인은 나의 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초췌하고 때가 꼬질꼬질한 것이 영락없는 거지였다.

 

노인은 술기운에 젖어 술 냄새가 진동을 하였다.

 

“어르신, 저 기억 하시겠어요?”

 

“젊은이는. 언제가 언젠가 찾아올 줄 알았지.”

 

여전히 노인의 눈은 매섭고 차가웠다.

 

난 노인을 부축해 가까운 해장국 집으로 들어갔다.

 

 

노인은 얼마나 굶었는지 해장국이 나오자마자 입안으로 쑤셔 넣기 시작했다.

 

난 궁금한 것이 많이 마음이 조급했지만 노인이 식사를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

 

노인은 내 것까지 해장국을 먹고 나서야 식사를 마쳤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옆에 끼고 있던 낡은 가방에서 여러 권의 낡은 책을 꺼내었다.

 

책에는 한자가 적혀 있었는데 아주 먼 옛날 것처럼 보였다.

 

노인은 공책을 이리저리 뒤지더니 한 부분을 펼쳤다.

 

그곳엔 나와 은주의 한자이름과 생년월일이 적혀 있었다.

 

노인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의 눈을 보며 물었다.

 

“그 아가씨는 어디 있는가?”

 

“집에 있을 겁니다.”

 

“내 말은 아직 이 세상에 있냐는 말이야. 살아 있느냐고?”

 

난 숨을 고르며 노인을 쳐다보았다.

 

“그 아가씨는 말이야. 이 땅에서 살수 없는 사주를 타고났어. 스물다섯을 못 넘겨.”

 

난 마른침을 삼켰다.

 

“내일이 4년마다 돌아오는 윤달이야. 그리고 그 아가씨 생일이기도 하고. 자세하게 설명해줄 수는 없지만 그 아가씨 사주는 내일이 끝이야. 일반적으로 100년의 운을 타고 나오는 사람에 비해 아가씨는 4분의 1정도 운을 타고 났다고 하면 알아듣겠는가? 물론 그날 태어난 모든 사람들이 다 같은 사주인 것은 아니야. 허나 그 아가씨 생시와 팔자를 보아도 이미 운을 다했어. 더 이상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야.”


난 노인의 말에 숨이 막혔다.


“어르신, 방법이 없습니까? 그 사람 꼭 살아야 합니다.”

 

노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인연이란 그런 것이지. 다음세상을 기약하게나. 어찌 되었든 꼭 만나야 했던 사람이기 때문에 현세에서 만나진 것이라면 다음 생의 인연이 되기 위해서라도 이쯤에서 놓아주는 것이 자네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일 듯싶네. 만약 자네가 함께 세상을 떠난다 해도 그건 천기운행의 이치가 아니야. 그래서는 더더욱 다음 세상에서 만날 수 없는 것이고. 정해진 사주는 바꿀 수 없는 것이라네. 자네의 사주, 인생, 운명은 자네 것이야. 그 아가씨의 운명도 그 아가씨의 것이지. 편히 보내주게나. 그 아가씨도 그걸 원할게야.”

 

난 노인을 뿌리치고 탁자 위에 만 원짜리 몇 장 놓고 밖으로 나와 버렸다.

 

약속시간보다 30분 일찍 카페에 도착한 나는 거리 풍경이 한눈에 보이는 테이블로 앉았다.

 

난 좀 전에 만나고 온 노인과의 대화와 내일 일어날 일들로 머릿속이 복잡했다.

 

 물을 한 모금 들이켜 보았지만 목구멍으로 넘어가질 않았다.

 

난 주머니에서 반지함을 꺼내 만지작거렸다. 때마침   가 흘러나왔다.

 

반지함을 열다가 다시 닫아버리고 주머니 속에 찔러 넣었다. 약속시간보다 15분이 지났다.

 

은주는 지난 4년 동안 단 한 번도 약속을 어기거나 시간을 어긴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나는 더욱 초조해져만 갔다.

 

초조한 마음에 화장실로 가서 세